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가 귀신과 신이다.
귀신과 신은 존재를 증명하기도 어렵고 인식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각기 다른 귀신과 신이 창조된다.
염라대왕 저승사자 등 살아있는 사람의 신분처럼 귀신들의 신분도 나뉜다. 무당들은 접신을 통해서 귀신의 예지력을 갖는다고 묘사한다. 귀신이 조선시대에는 한복을 입고 유럽에서는 양복을 입는다. 전설의 고향에서는 한국말을 하고 영화에서는 영어를 한다. 요즘 좀 더 잘 만든 영화에서는 마치 외계어 같은 알아 듣지 않는 말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주제 처럼 귀신의 하는 짓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이 어렵다.
미친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의 경계도 모호하다.
근대까지 병이드는 것은 귀신에 붙잡힌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귀신을 쫓아 내는 축귀가 능력의 잣대로 판단되는 성경 구절들도 여럿 나온다
아기를 점지해주는 삼신 죽은 사람을 살려보내는 옥황상제 등 사람들이 생명과 죽음 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에 그럴싸한 신의 존재를 끼워 넣었는데 고대에는 이것이 통했는데 과학의 시대에 이 막연한 전통적 믿음이 공격 당하고 있다.
귀신과 신은 질량이 없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은하계, 태양계, 지구의 현재 내가 존재하는 위치에 위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으로 따라와야 한다. 질량이 없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든 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과학을 아는 세대에 신과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에게 신과 귀신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다.
DNA 바이러스 세균 등 점점 더 작은 존재들이 우리 큰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 위에 존재하는 신의 영역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있다.
물질과 생물이 스스로 생존과 번식이라는 존재 목적에 부합하여 살고있어서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일 참아야 하는 일에 대한 필요성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죽은 후의 삶에 관심이 없어지고 살아 있을 때 마음껏 누리지 못함을 바보스러워 한다.
부의 방법보다 양에 집중하는 시대. 지식과 능력이 뒤쳐지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차가운 이 시대가 무한한 욕구충족과 안정된 이기적 삶에 집중하는 것은 하늘의 공중권세 잡은 악한 세력에 붙잡혔기 때문은 아닐까 ?
목이 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지만 결국 마신 소금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그런 아이러니의 시대는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주변에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그 말씀의 실체를 알 수있다.
귀신들린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귀신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구신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하지만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구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