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친일파 찬송가

malssum 2022. 2. 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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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에서 빼야 하는 찬송

 

한국교회는 친일파 문제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를 지나 지금의 시대에는 청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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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중략)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잔잔한 바다 잔잔한 바다."

 

 

친일행적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활란은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적극 나섰다. 김활란은 야마기 가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주최의 ‘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에서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였다. 1942년 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에 부인대를 신설하여 여성 동원을 강제하였는데 김활란은 지도위원으로 이 단체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하여 1942년 징병제 실시를 발표하였을 때 김활란은 징병제를 맞이하는 조선 여성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국가를 위해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국가에 속한 남편이나 아들 또한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출처: 「여성의 무장」, 『대동아(大東亞)』, 1942년 3월 발행 )

이러한 친일, 전쟁협력의 와중에 김활란은 1939년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다. 일본은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가 전시정책에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기독교계 학교를 인수하거나 폐교하였다. 이때 일제는 선교사 교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였는데 이때 김활란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뒤를 이어 최초로 한국인으로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다. 김활란은 일찍이 이화여전의 교육을 자신의 손으로 이끌고자 하였고 교육의 내용, 학교 분위기를 ‘조선적’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평소의 소신으로 김활란은 일제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화여전에서 기독교의식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급기야 1943년에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의해 대학교육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화여전은 1년제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격하되어 운영되었다.

 

김활란은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금차회 따위에 참여하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문인답게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內鮮)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를 발표하고,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따위 강연을 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중략)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중략)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중략)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시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일부

김활란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친일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교내에 설치된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선 이유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대생들은 30일 서울 서대문구 교내 본관 앞에 설치된 김활란 총장의 동상에 철거를 요구하는 쪽지(포스트잇)를 붙이는 플래시몹을 했다. 3m 높이의 동상에는 학생들이 붙인 쪽지가 얼굴 부분까지 빼곡하게 찼다.

학생들은 "당신이 이곳에 있음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김활란동상 철거를 요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화에 부끄러운 딱 한 가지", "김활란 내려오고 유관순을 올리자", "잘못된 것은 자정하는 이화인이 됩시다"는 글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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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부르십니다.(중략)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다/ 풍파많은 세상에서 선한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579장)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여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수많은 친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 친일 행적에 대하여 뭐가 잘못이냐고 큰소리치면서 지금도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

 

"나라의 부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

몸에 지니고 싸우시면/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아요/
북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밑에 재우겠어요/

꿈에 돌아오시는 당신은/

원앙침에 주무시게 하겠어요
아무르의 얼음도 여름에는 녹겠지요/

녹았어도 소식이 없는 여름일랑/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서강 저녁놀의 타는 듯한 붉은 핏빛은/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신 당신의 피/

무언의 개선, 마을 역 앞에서/ 하이얀 댕기 드리우고 만세를 외치겠어요"

댕기 시 전문 -タンギ –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

출처 : 한겨레:온(http://www.hanion.co.kr)

 

시 <불놀이>와 <빗소리>로 잘 알려진 주요한이 지은 찬송가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5월 어버이주일이 되면 자주 부른다. 우리교회 역시 부른다. 하지만 주요한 역시 김활란처럼 친일부역자다.

"오늘에서랴 우리를 /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 서로 전하여 말하며 / 눈물 흘리는 것을"

1944년 4월 지은 '손에 손을'이다. 징병제를 찬양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조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징병으로 끌려가 죽은 이인석을 위해 지은 '첫피'는 핏속에 친일이 흘러넘침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2천 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 피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는 말은 우리 역사 자체를 부정한다. 주요한 의식 속에는 고조선-삼국-고려-조선이 없다. 오직 일본제국주의만 자신의 역사인 셈이다. 친일도 완벽한 친일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노랫말이 찬송가에 실려 지금도 한국교회가 부르고 있다. 찬송가에서는 주요한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요한(1900~1979)은 시인이며 언론인·정치인,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시인으로 문예 동인지 <창조>에 '불놀이'란 시를 발표하였다. 본 찬송시는 1967년 한국찬송가위원회로부터 어머니날 찬송가를 의뢰받고 특별히 쓴 것으로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참 흥미로운 설명이다.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뼛속까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감췄다. 친일행적 부끄러움을 안다면 이제 김활란과 주요한이 지은 두 노래는 찬송가에서 빼야 한다. 사실 기회가 있었다. 지난 2006년 '새찬송가'가 나왔다. 1981년 통일찬송가 이후 35년만이었다. 1981년에는 김활란과 주요한의 친일행적이 도마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갔지만, 2006년 새찬송가를 만들 때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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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교회에서 아직도 일제군가나 창가의 곡을 그대로 따온 찬송가와 복음성가들을 널리 부르고 있다. 그중에는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고종을 연금한 뒤 청(중국)의 북양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조선 식민지배의 토대를 굳힌 청일전쟁 찬양 군가도 포함돼 있다. 1929년에 태어나 신의주와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조형균(78·사진) 계성종이 역사박물관 관장은 “해방 전엔 그렇다 치고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하니 도대체 우리가 해방된 민족인지 통탄스러울 때가 있다”고 탄식했다.

지난 2일 기자와 만난 조 관장은 “일제 때 경찰을 했던 사람이 해방되자 속죄하는 심정으로 교회의 부흥강사가 됐다면서 퍼뜨린 노래 중에 〈부럽지 않네〉라는 성가가 있다”며 “거기에 붙인 곡조는 청일전쟁 때의 일본 해군 노래”라고 말했다.

79년 11월30일에 초판이 나온 뒤 81년까지 확인된 것만으로 20판을 찍어낸 부흥회용 〈복음성가〉(영산출판사) 제5장, 그리고 97년 3월20일 발행된 〈새로운 복음성가〉(새로운 출판사) 제40장에 실린 이 노래는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로 시작하는데 모두 4절까지 있고 마지막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다.

조 관장은 이 노래에 붙은 곡은 1895년 사사키 노부쓰나라는 사람이 작사하고 오쿠 요시이사라는 사람이 작곡한 〈용감한 수병〉에서 따온 노래로, 청일전쟁 승리를 찬양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본의 국민가요였다고 했다. 그 노래 8절에 나오는 “아직 그대롭니까 적함 정원(定遠)은?/ 그 말 한 마디는 짧을지라도/ 황국을 생각하는 온 국민의/ 마음에 길이길이 쓰여지리라”라는 가사는 중상을 당하고도 부함장을 찾아 적함이 격침됐는지를 묻고 바로 숨졌다는 어느 3등 수병을 영웅화한 내용이다.

일제군가 ‘용감한 수병’

찬송가 ‘부럽지않네’
 

노동은 중앙대 창작음악과 교수는 문제의 노래가 청일전쟁 뒤 ‘데이치쿠 주식회사’가 소방청음악대와 합창대의 노래로 녹음한 것이며, 1910년 대한제국 학부가 발행한 〈보통교육창가집〉에도 〈권학가〉란 제목으로 같은 악보가 실려 있다고 말했다.

조 관장은 〈새로운 복음성가〉 제50장 〈허사가〉도 같은 곡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부흥회용 〈복음성가〉 제35장에 들어 있는 〈신구약 성경 목록가(창세기 출애굽기)〉는 어린이 신도나 교회에 처음 나가는 사람들이 성경내용을 암송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인데, 이는 일제가 도쿄 신바시에서 요코하마 쪽으로 철도를 놓아 개통했을 때 지어 부른 4행 66절 노래 〈철도창가-도카이도편〉에서 곡을 따왔다고 말했다. 이 〈철도창가〉의 곡은 〈새로운 복음성가〉 제88장의 〈요일가〉와 유행가처럼 불린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로 시작하는 〈학도가〉에도 붙었고, 민속음악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도 원래 곡 대신 붙여져 널리 불렸다.
  

일제군가 ‘철도창가’

찬송가 ‘신구약 성경목록가’

‘학도가’
 

또 하나, 80년 신군부의 언론기관 통폐합조처로 한국방송공사에 흡수된 〈동아방송〉이 한때 새벽에 방송을 시작할 때 흘려보낸 ‘콜사인 뮤직’ 역시 일제 군가 〈흥아(興亞) 행진곡〉의 각 소절 꼬리 부분만 슬쩍 바꿔 붙인 “명백한 표절”이었다. 〈흥아행진곡〉 1절 가사는 “이제는 세기의 새벽노을 풍영(豊榮) 솟아오르는/ 욱일의 …흥아의 사명 두 어깨에/ 짊어지고 섰도다/ 5억의 백성”으로 돼 있다. 노동은 교수는 58년에 박경원씨가 불러 인기를 끌었던 김교성 작곡의 가요 〈만리포 사랑〉도 “(흥아행진곡의) 완벽한 표절이라 할 순 없지만 비슷하게 진행된다”면서, 조 관장의 얘기가 “모두 옳은 지적”이라고 했다.  

일제군가 ‘흥아행진곡’

일제군가 ‘군함(행진곡)’


직접 일본에 가서 악보를 채집해 오는 등 수년간 애쓴 끝에 이런 사실을 밝혀낸 조 관장은 “최근 한국방송의 노인프로그램에서 죽음준비학교를 소개하는 중에도 〈철도창가〉를 딴 노래가 나왔다”면서 “어디서 또 일제의 ‘망령’이 튀어나올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노 교수는 “그동안 항일독립운동가나 동요에 일제군가나 창가의 곡에 가사만 바꾸거나 표절을 한 노래들이 많다는 사실은 지적이 돼왔지만 찬송가는 그런 줄도 모른 채 지금도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며 “우리 음악계에서 해야 할 일을 한 개인이 밝혀내 놀랍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찬송가 〈주님 고대가〉도 일본 음계와 박자로 작곡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 ‘악보 모음’ ☞ 다운받기 ☜

조 관장은 이런 사실을 〈씨알의 소리〉 2007년 7·8월호에서도 밝힌 바 있다. 펄프·제지 전문가로 우리나라 근현대 종이 역사의 산증인인 그는 우리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일제군가’ 음원 제공 : 노동은 중앙대 창작음악과 교수<한겨레신문, 0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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